■ 리뷰&팁 | Review & Tip
 
  
 
작성일 : 04-04-20 00:24
[리뷰] 크렐 SACD 스탠다드 SACDP
 글쓴이 : 최윤구
조회 : 13,371  


차세대 포맷 자리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SACD와 DVD-A간의 전쟁은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다. 어느 한 쪽이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는 국면을 맞는 듯 싶었다가도 다른 쪽에서의 지원이나 필사적인 자구책 마련으로 전선은 다시 고착되곤 한다. 결국, CD 때와 같은 특수를 바라던 하드웨어 업체쪽에서는 유니버셜 플레이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사실 유니버셜 플레이어는 업체에게나 소비자에게나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일종의 변칙적인 해답이라는 생각이다. 아무리 충실하게 만들어 냈다 해도 복합기는 전용기만 못한 것이 모든 공산품의 숙명이요, 오디오 기기처럼 취미생활을 위한 것일 때에는 더욱 그렇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드웨어, 특히 디지털 소스쪽의 상황은 가히 춘추전국이다. 한때 패자의 위치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 싶었던 와디아는 부진을 거듭하고 있으며, 마크레빈슨 역시 디지털 소스쪽에서는 이렇다할 신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것뿐인가, 독자적인 디지털 기술을 가진 몇 안 되는 하이파이 업체인 린 역시 자사의 기념비적인 단품 CDP CD-12의 후속기로 유니버셜 플레이어 유니 디스크를 내놓는 등 시장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가장 이해가 안가는 업체는 메리디안, DVD라는 매체에 대해 그 출생에서부터 기술적으로나 사업적으로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그들이 전용 DVD 오디오 플레이어를 내놓는 대신에 G 시리즈라는 레드북 CD 전용 플레이어를 시장에 출시한 것이다.

하드웨어 업체들의 이런 움직임은 모두 포스트 CD 시대의 주인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다른 말로 산업표준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용 플레이어가 전무한 DVD 오디오와는 달리 SACD 진영은 이 포맷을 제안한 소니와 필립스를 중심으로 꾸준히 전용 플레이어가 시장에 소개되어 왔었다. 세계 최초의 SACDP로서, 문자 그대로의 플래그 쉽이었던 SCD-1을 기반으로 한 소니의 전용 SACDP 라인은 현재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전용 SACDP군일 것이며, 소니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제품을 선보였던 마란츠의 제품들 역시 수준급이다.

하지만 애호가들은 ‘가전’ 제품 메이커와 ‘일본’ 오디오 메이커가 아닌 유럽이나 미국의 하이엔드 업체들이 내놓은 SACDP를 간절히 기다려 왔다. 클라세나 린드만 같은 업체에서 하이엔드 급의 SACDP를 내놓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지나치게 고가였고, 결정적으로 국내에는 정식으로 수입이 되지 않았다. 이런점에서 크렐 SACDP 스탠다드의 등장은 적어도 국내에서는 무주공산을 손쉽게 점령할 절대강자의 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격적으로 리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먼저 유념해주었으면 하는 점이 있는데, 필자는 일본의 오디오 평론가 스가노의 ‘레코드 연주가론’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오디오란 AV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음악을 듣는’ 기계였다. 칼날이 부딪치고 탄환이 얼굴피부를 스치며 탄피가 바닥에 수북히 쌓이고 포탄이 사방에서 작렬할 때의 그 ‘효과음’ 들을 듣기 위한 오디오가 등장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에리히 쿤젤의 1812년 첫 번째 녹음이나 서부영화 주제곡 모음인 "Round Up" 등 텔락의 ‘효과음’ 풍부한 음반들을 즐겨 들어왔던 필자는 이런 취미를 평가절하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이러한 효과음, 즉 AV적인 측면과 기존의 음악을 듣기 위한 오디오 기기들이 추구했던 세계는 무척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결론을 미리 밝히자면 크렐의 스탠다드는 이 회사가 음악을 듣기 위한 기기를 열정적으로 만들어 냈던 때의 그 정신을 가지고 튜닝을 했다는 생각이 시청 내내 필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별한 평가방법이랄 것은 없고, 그저 많은 음반을 이 기계를 통해 들어 보았다. 아마 동일 음원을 CD와 SACD로(하이브리드 SACD의 CD 레이어와 SACD 레이어를 번갈아 가면서 듣는 것이 아니라) 비교시청해 보았다는 것이 종래의 리뷰와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일 것이며, 기계의 특성이 어떻다기 보다는 음악이 필자의 귀에 어떻게 들려왔다는 식으로 서술된다는 점이 또한 다른 점일 것이다.

클래식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하고 빈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베토벤 교향곡 5&7. LP로, CD로, 그 다음에는 디 오리지널스라는 메이저 회사 최초의 리마스터링 시리즈의 대표작으로 굴지의 클래식 레이블 DG의 간판 모델로 군림해 왔던 음반이다. 클라이버는 재즈 아티스트를 능가할 정도의 유연한 리듬감각을 과시하는 지휘자로 그가 지휘하면 모든 음악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생명력이 넘쳐 흐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토스카니니에서 시작된 즉물주의 해석의 한 정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5번 보다는, 바그너가 ‘춤의 권화’라고 부른 7번이야말로 클라이버식 베토벤 해석을 맛보기에 더욱 적합하다. LP 시절에도, CD 시대에도 각각 낱장 판매되었던 클라이버의 베토벤은 디 오리지널스로 출시되면서 한 장에 담기게 되었고, 음질도 향상되었다.

많은 음악 애호가들에게 클라이버의 베토벤은 리마스터링이라는 마술과도 같은 작업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심는 계기이자 필자에게는 기기를 바꾸는 것보다는 음반을 바꾸는 것이 대개의 경우 더 경제적이라는 확신을 심어준 전환점이 된 여러 모로 기념비적인 음반이다. 그리고 이번 SACD 버전은 필자의 확신을 일종의 신념으로 만들어 줄 것만 같다. 일단 저역의 움직임이 CD 버전에 비해 너무나 자연스럽다. SACD에 비하면 CD의 저역은 숫제 무너지는 수준이다. 빈 필 특유의 노래하는 듯한 소릿결과 클라이버의 날카로운 리듬 감각 역시 SACD 쪽이 훨씬 첨예하다. 쓰기는 첨예하다고 썼지만 막상 귀로 들었을 때의 감각은 풍려한 쪽에 가깝다. 이것은 말뜻 그대로 모순이지만 그러나 사실이며, 이런 모순된 명제를 참으로 성립시키는 데에 DG와 크렐의 만만치 않은 실력이 녹아 있는 것이다.

윌리엄 크리스티 레 자르 플로리상이 지휘하는 샤르팡티에(테 데움). CD 시절부터 우수한 녹음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던 음반이다. CD 버전을 스탠다드에 걸어 들어보았지만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곡은 드럼의 독주로 시작되는데 제일 녹음하기 힘든 소리 중의 하나인 타악기(여기서는 큰 북)의 독주를 섬세하다는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포착해 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전용 CDP로서의 스탠다드의 특성이 잘 드러났는데 필자의 CDP인 이케미가 큰 북 주자의 솔로를 무대 안쪽에 위치시킨다면 스탠다드는 그것을 앞으로 끌어내면서 소리를 좀 더 늠름하게 만든다. 진군을 알리는 군악대의 그것이 아니므로 음악적으로는 이케미쪽에 좀 더 점수를 주게 되지만, 문제는 SACD를 스탠다드에 걸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주변이 말끔하게 정리되면서 리스닝 공간에는 오로지 큰 북의 독주만이 등장했는데 앞으로 나선다든가 뒤로 물러섰다든가 하는 부분적인 특징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설명히 불가능할 정도로 음장감이 입체적이 되었으며 음색이나 해상도 역시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큰 북의 솔로가 끝나고 베이스의 독창에 딸려 나오는 오르간 역시 SACD 버전에서는 그 윤곽 뿐만 아니라 멜로디 라인의 움직임이 악보를 들여다 보는 것 만큼이나 선연하다. 오디오로 재생이 가장 어렵다는 두 개의 악기를 하모니와 문디와 크렐의 이중주가 완벽하게 요리해내고 있는 것이다.

조르디 사발의 태양왕의 오케스트라. 가장 영향력 있는 원전음악인의 한 명인 조르디 사발의 야심작. 버진과 아스트레를 거치며 활발한 녹음활동을 펼쳐왔던 사발은 자신이 직접 알리아 복스라는 음반사를 차리기에 이른다. 아무래도 사발과 같은 학구적인 음악인에게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음악과 레코드 회사에서 요구하는 음악이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시도는 이미 탈리스 스콜라스의 지휘자인 피터 필립스가 기멜이라는 레이블을 출범시킨 선례가 있다. 비교적 순항하는 듯했던 기멜은 여러 가지 이유로 침체일로를 걷다가 필립스에 합병됐지만, 필립스는 클래식 파트를 줄이면서 기멜을 놓아주었고 기멜의 사세는 현재 별다른 신규녹음 없이 기존의 음원들로 이루어진 카탈로그를 유지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알리아 복스에서 처음 내놓은 음반들을 접한 애호가들이 너무나 학구적이고 높은 수준에 투덜거리던 무렵 나온 이 음반은 단박에 이 신생 레이블을 음반시장의 무시못할 강자로 지목하게끔 만들었다. 영화 "왕의 춤"에서도 다루어졌던 루이 14세의 궁정 음악가 륄리의 음악들로 꾸며진 이 음반은 초기 디지털 녹음의 한계와 주로 영국 음악인들의 특징인 간결하고 빠른 진행 때문에 원전악기라면 약간 피치가 높고 날카로우며 여유가 부족하다는 애호가들의 ‘편견’을 산산조각 내버릴 만큼 녹음이 우수했다.

이제는 가장 인기 있는 바로크 이전 음악의 하나가 되어버린 4번 트랙 「터키풍의 행진곡」은 이국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다양한 악기들이 동원되고 있는데, SACD 버전은 그 악기들의 소리를 하나의 하모니로 담아 내면서도 그들의 개성을 하나씩 분리해 내서 펼쳐 보이는 데도 인색하지 않다. 저역 역시 압도적으로 SACD 쪽이 좋은데 CD의 저역은 질적인 면에서 비트 박스의 그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열세를 보인다.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키로프 오케스트라의 림스키 코르사코프(셰헤라자데). 발매 당시부터 필자로 하여금 음질적인 면으로는 오디오를 좀 더 좋은 것으로 바꾸고 싶은 욕심이 들게끔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불만이 없다는 극찬을 하게끔 만들만큼 우수한 음반이었지만 스탠다드로 SACD 버전을 듣고 나서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안 들리는 소리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극한의 해상력을 보여주는 데다가 크렐답게 소리의 골격이 우람하면서도 유연할 때는 버늘가지처럼 흐느적 거리며, 키로프 오케스트라의 만만찮은 역량을 대변하는 악장의 바이올린 솔로의 요염함을 만족스럽게 재현해내는 분위기 묘사까지 소리를 통해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놀이동산에 가고 싶은데 시간이 안 된다면 이 음반을 스탠다드에 걸어보라. 당신은 신드바드가 되어 일곱 바다를 누비는 모험의 세계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여성 재즈 보컬



여성 재즈 보컬이라는 장르는 없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은 평론가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여성 재즈 보컬이라는 암시장을 벌여놓고 있다. 이 암시장에는 크게 오로지 백인 여성만을 찾는 속칭 블론드 보컬파와 흑인 여성만을 찾는 족속으로 나뉘어지는데 여기에 재즈가 세계화되면서 멀리는 ‘이파나마에서 온 소녀’ 아스투르드 질베르토나 가까이는 야신타나 게이코 리같은 이들이 가세함으로써 선택의 여지를 넓혀 놓았다. 많은 오디오 파일들이 이들의 노래로 자신의 오디오를 테스트하고 있으며, 그못지 않게 많은 재즈 애호가들이 이들의 목소리를 더욱 맛깔스럽게 재현해줄 오디오를 찾아 헤매고 있다.

필자가 골라든 것은 오디오 파일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음반 중 최근 SACD로 복각된 것들인데, 먼저 캐롤키드의 음반. 린에서 음반도 내놓는다는건 이제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 나라에서만큼은 「When I Dream」 이 한 곡 때문에 소수의 오디오 파일들을 상대로 하는 린은 자신들로서는 상상도 못했을 막대한 판매고를 올렸다. 린은 캐롤 키드의 음반 세 장을 SACD로 복각했는데 그 중 「All My Tomorrows」가 「When I Dream」을 담고 있다. SACD 버전은 일단 분위기 묘사에서 CD를 저만치 앞서간다. 관록 있는 가수들이 무대에서 보이는 장악력과 흡사한 카리스마가 스탠다드로 듣는 SACD 버전에서는 존재한다. 착 가라앉은 스테이지에서, 흘러 나온다기 보다는 피어 오르는 듯한 캐롤 키드의 노래는 이 가수가 재즈적인 속성은 부족할지 몰라도 훌륭한 성인취향 가수라는 필자의 평소 생각을 굳혀 주었다. CD에서는 어딘가 외따로 연주한다는 느낌의 기타반주도 농밀함과 상큼함이 첨가되어 나 여기 있노라고 자신의 존재를 한껏 외치고 있다.

노라 존스. 이 가수 역시 재즈다 아니다 말이 많지만 문제는 노래. 재즈 계열에서는 좀체로 나오기 힘든 스매쉬 히트곡 「Don't know why」를 SACD 버전으로 들으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노라 존스가 원래 이렇게 노래를 잘했었나?’ 습기라고 해야 할까. 흑인들 특유의 끈끈함과는 다르지만 CD 버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촉촉함이 그녀의 목소리에 배어 있다. 필자는 노라 존스의 음악이 재즈가 아니라는 쪽이었지만 이런 ‘소리’를 들으니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순순하게 음악을 즐기는 입장에 서면 즐거움만이 넘쳐날 뿐이었다. 9.11을 겪은 뉴욕 시민들에게 노라 존스의 음악이 위안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사무치게 와닿는 경험을 스탠다드로 듣는 노라존스의 SACD는 가능하게 해준다.

다이아나 크롤의 "The look of love". 버브가 사운을 걸고 미는 블론드 보컬의 정통 후계자. 원래 피아니스트로 경력을 시작했던 그녀였지만, 그만한 미모를 가진 젊은 금발미녀가 입도 뻥끗 안하고 피아노만 치는 것을 사람들은 용납지 않았다. "The look of love"는 대중도 본인 자신도 ‘다이아나 크롤은 보컬리스트’라는 생각에 완전히 익숙해졌을 무렵에 나온 음반으로 그녀의 공식 웹사이트 주소가 음반에 명기될 정도로 거물이 되버린 다이아나 크롤의 야심작이다. 첫 곡인 「S'wonderful」에서 다이아나 크롤은 무르익은 보컬 테크닉을 과시하는데, 때로는 허스키하게 때로는 감미롭게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녀의 노래실력은 여전히 전 시대의 디바급 여가수들과 비교하기는 무리지만 상업적인 재즈 싱어로서 그녀가 정상의 위치에 있을 만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오디오적인 면에서는 불만이 없지 않았는데 CD 버전으로 들을 때 하이햇의 소리가 너무도 날카로웠던 것이다. 골수 재즈팬들은 알 것이다. 음반으로 재즈를 들을 때 브러시가 철사로 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는 날카롭고 피곤한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올 때의 그 좌절감을. 그럴 때면 필자는 섬세하긴 했지만 신경질적인 면도 있는 것으로 알려진 스캔 스픽의 유닛을 사용한 필자의 스피커, 카시오페아 알파의 트위터에 원망의 눈길을 보내곤 했는데 SACD 버전으로 들어보니 엉뚱한데 화풀이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날카롭긴 하지만 피곤함과는 거리가 먼, 그러니까 악기의 재질이 금속성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정도로 소리가 변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소스 기기나 음반을 바꿀 때마다 그 변화 양상을 곧이 곧대로 일러 바쳐주는 스피커가 기특해질 수 밖에.

마지막으로 레베카 피존. 오디오 파일들의 성전이자 중역 테스트의 영원한 레퍼런스. 지금도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는 만족을, 누군가에게는 좌절을 안겨주고 있을 그녀의 「Spanish Harlem」. 이 노래를 SACD로 들었을 때의 감상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I see the dead people." 베이스 워킹부터가 다르다. 그녀의 목소리에 떠도는 불가사의한 여운도 그렇지만, 피아노와 쉐이커가 섞여 들어올 때의 그 명료함이라니. 기타와 바이올린은 왜 또 그렇게 정겨운가. 그 어떤 음반보다도 CD와 SACD간의 차이가 극명하다 보니 필자에게 신이 내려서 레베카 피존과 그 패거리들의 등뒤나 어깨 너머에서 연주하고 있는 유령들의 소리까지를 듣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음질의 차이를 정당화하기가 어렵다. 필자는 이 음반을 듣고 나서 오디오를 뒤로 한 채로 자료를 뒤적여 SACD의 스펙을 보면서 ‘그래, 결국 정보량의 차이란 말이지’ 하면서 한참이나 혼자 중얼거렸다.





비록 워너의 물량공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록쪽으로도 상당한 분량의 SACD가 나와 있는데 대표적으로 롤링 스톤즈의 베스트와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골라 보았다. 기존의 CD에 비해 훨씬 더 경쾌해지고 박력이 가미된 롤링 스톤즈도 훌륭하지만 핑크 플로이드에서 받는 충격은 거의 레베카 피존에서의 그것을 방불케 한다. 음반을 플레이어에 거는 순간 리스닝 룸은 소리로 흘러 넘치는데, 첫 트랙의 심장 박동소리가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거기에 내 심장의 뜀박질도 맞춰야 할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필자는 음악은 스테레오로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이런 음악만큼은 멀티 채널로 듣는 것이 정석일 것이다.

결론



스탠다드라는 이름에서부터 오만에 가까운 크렐의 자신감이 배어 나오지만 강자들이 즐비한 강호에서, 더군다나 소프트웨어쪽에서 산업표준이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스탠다드라는 이름을 내건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확실히 단품 CDP로만, 그것도 클래식 분야에 한정해서 스탠다드를 평가한다면 필자의 주력기인 린의 이케미에 비해서 부족한 점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소리의 윤곽과 골격 모두 선이 굵고 우람하며, 앞으로 뛰쳐나오려는 힘찬 소리. 그러나 지적한 이 모든 특징들은 재즈나 록쪽으로 가면 고스란히 장점으로 변하게 된다. 실지로 필자는 그동안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쓰고 있었던 록과 재즈의 명반들을 차례로 꺼내 들으면서 아메리칸 사운드나 브리티시 사운드는 실체 없는 뜬 소문이라는 주장을 조용히 비웃어 주었다.

아니, 최소한 크렐 고유의 사운드는 분명히 존재했다. 반도체 소자를 사용한 오디오 기기는 다 그게 그거라는 사람들에게 구구히 말로 반박하기 보다는 크렐의 스탠다드와 린을 차례로 물려가며 음악을 틀어준 뒤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응책일 것이다. 언젠가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오디오 파일에게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돌아왔던 ‘어떤 오디오를 쓰냐에 따라 좋아하는 음악도 달라져요’라는 대답에 배어 있는 무시무시한 내공을 스탠다드를 리뷰하는 동안 절감해야만 했다.

하지만 SACD로 가면 웬만한 앰프 저리가라 할만한 덩치와 무게를 자랑하는 이 디지털 플레이어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출중한 소리를 뿜어낸다. 스탠다드로 SACD를 들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굳이 소리를 고.중.저로 나누지 않고 소리 그 자체로서 즐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스탠다드라는 소스 기기가 뽑아낸 소리가 중립적이면서 자연스러웠기 때문인데, 바로 이 ‘중립적인 자연스러움’이야말로 궁극의 오디오 기기들, 다시 말해 하이엔드 기기들이 지향하는 목표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음악은 현장에서 들어보면 우리가 오디오를 통해 분석적으로 들을 때 기를 쓰고 나누려고 하는 고음, 중음, 저음 대신 그저 음악으로 존재할 뿐이다. SACD는 적어도 필자가 접해본 한에서는 현장음에 가장 근접한 소리를 들려준 디지털 매체였다. 비록 절정의 경지에 오른 레드북 CD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 너무나도 아름다운 백조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고, 현재 시장에 유통되는 음악을 들려주는 매체 중 가장 관록 있는 매체인 LP가 건재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전성기가 지나간 과거의 매체들이고 그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SACD와는 다른 세계다.

만일, 소프트웨어의 부족이 염려된다면 "http://www.deutschegrammophon.com/whatscoming/left.htms?ART_ID=&LABEL=& SERIES=&"를 찾아가 보시라. 세계 최대의 클래식 레이블인 유니버셜 중에서도 핵심 레이블인 DG는 5월을 기점으로 SACD를 그야말로 쏟아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역시 유니버셜 산하인 필립스는 가을에 저 유명한 머큐리의 리빙 프레즌스 시리즈를 SACD로 발매할 계획이다. 그리고 오대 메이저 레이블 중 셋이 손을 털고 떠난 시장에서 이제 메이저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하모니아 문디 역시 신작을 하이브리드 타입의 SACD로 발매하면서 헤레베헤 등 자사의 주력 아티스트들의 음원을 꾸준히 SACD로 복각해 내놓고 있다. 적어도 클래식에 관한한 레퍼토리의 부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재즈 역시 유니버셜 산하의 버브가 신보와 구보를 아우르는 발매 스케쥴을 잡아놓은 상태이고, 프레스티지와 리버사이드 등을 거느린 굴지의 재즈 레이블 판타지는 자사의 20비트 리마스터링 시리즈를 SACD화 하고 있다. 록은 DVD 오디오 진영의 맹주격인 워너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지지부진한 상태이긴 하지만 소니가 꾸준히 타이틀을 내놓고 있고 여기에 유니버셜이 롤링 스톤즈를 기점으로 타이틀을 추가시키고 있는 상태이므로 상황은 호전되리라고 본다.

필자가 스테레오 파일 같은 영미권의 잡지를 보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이들 잡지들은 결론 부분에 진짜 결론이 나와 있기 때문에 골치 아프게 본문을 영문독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최대의 찬사는 ‘나는 이 리뷰제품을 구입했다’였다. 그 정신을 여기에 되살리자면 필자는 스탠다드의 구입을 심각하게 고려중이다. 비록 단품 CDP로서는 필자의 이케미에 비해서 특히 클래식 장르에서 취약점을 보이지만 록과 재즈에서는 그만이었고 SACDP로서는 당분간 이 가격대에서 이 기기를 능가할 제품은 나타나기 쉽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해둘 것은 필자가 여태껏 들어본 SACDP들이 동일 가격대의 CDP들과의 비교에서 SACD라는 차세대 포맷의 우위를 확실하게 보여주지 못한 반면, 스탠다드는 이거 혹시 업자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 차이를 확연하게 ‘들려주었’다는 점이다. 허나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이 현상이 본 리뷰기종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트레이의 개폐에 따른 플레이트의 떨림이 다소 과도한 편으로 덜거덕 거리는듯한 느낌이 적지않았다는 점이다. 굳이 필자가 사용하고 있는 린의 이케미에 비교해 보지 않는다 해도 이러한 점은 세심하게 개선되어야 할 부분일듯 싶다.

사양

Description: Multichannel SACD/CD player using 24-bit Burr-Brown, dual-differential DACs and Philips disc transport.
Digital outputs: 1 optical (TosLink), 1 S/PDIF (RCA), both CD only.
Analog outputs: 1 pair balanced (XLR), 5.1-channel single-ended (RCA).
Frequency response: 20Hz-20kHz, +0/-0.5dB.
S/N Ratio: 105dB SACD, 108dB CD, both A-weighted.
Channel separation: not specified.
Dimensions: 17.9" W by 5.7" H by 16.5" D. Weight: 25 lbs.
Finishes: black, silver.

리뷰에 사용된 기기

파워앰프 : 플리니우스 SA102
프리앰프 : BAT 5i
CDP : 린 이케미
인터 케이블 : 카다스 골든 레퍼런스, 킴버 1111, 리버맨 바이칼
파워 케이블 : 노더스트 쉬바, NBS 모니터 4, 리버맨 바로크 SE, 리버맨 바이칼
악세사리 : 블랙 다이아몬드 레이싱 콘 타입 3, 4, 큐 댐퍼
* 마스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1-02 14:31)